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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3. 23世 〉40. <부정공>오산공휘광두묘갈명(梧山公諱光枓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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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부정공>처사휘동하묘표(處士諱東夏墓表)
처사휘동하묘표(處士諱東夏墓表) 부군의 휘는 동하(東夏)요, 자는 충오(忠吾), 호는 가천(可川)이시다. 우리 옥천 조씨는 고려 문하시중 휘 장(璋)을 시조로 하여 三세를 지나 농은(農隱) 충헌공 휘 원길에 이르러 포은(圃隱) 정 몽주(鄭夢周)와 함께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한 공으로 옥천 부원군에 봉해지셨다. 이분의 아들 휘 유(瑜)는 호가 건곡(虔谷)으로 벼슬이 전농시 부정(典農侍副正)에 이르렀는데, 고려가 망하자 은거하여 절의를 지켰으며, 세종 때에 효자(孝子)의 정려를 내리고, 겸천원(謙川院)에서 향사(享祀)한다. 손자 휘 지륜(智崙)은 벼슬이 찰방이었는데 四형제가 우애(友愛)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후 휘 대성(大成)은 호가 매창(梅窓)인데 문장과 행의(行義)가 있어 곡수원(曲水院)과 무곡원(武曲院)에서 향사하니 이분이 공의 十三세조이시다. 고조의 휘는 두채(斗采)요, 증조의 휘는 창원(昌源), 조의 휘는 형구(馨九) 호는 지은(智隱), 고의 휘는 영인(永仁) 호는 상운(相雲)인데, 모두 행의가 있었으며, 비(妣) 문화 유씨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정호(廷濠)의 따님으로 고종 신미(一八七一)년 정월 十一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재주와 성품이 총혜(聰慧)하여 학당에가 기송(記誦)이 남다르고, 어버이를 섬김에 뜻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장성해서는 연재(淵齋) 송 선생의 문하에 나아가 예경(禮經)을 강론하고, 또 면암(勉菴) 최 선생을 종유(從游)하였는데 최 선생께서 매우 기대하고 허여하여 시를 주었는데, 「국화와 대나무는 늦가을 견디네 〈黃花綠竹耐深秋〉」라는 귀절이 있다. 부군께서는 시세가 크게 변하는 것을 보고는 세상에 나아갈 뜻을 두지않고 두문불출하며 오직 후생 가르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으니, 배우러 온 제자들이 매우 많았으며 또 향리의 동지(同志)들과 팔우계(八友契)를 조직해 아름다운 풍속을 일으키는데 힘쓰니 사람들 모두가 추중(推重)하였다. 향년 六十一세인 을해(一九三五)년 정월 二十一일에 졸하니, 곡성 오곡면(梧谷面) 미산리(彌山里) 앞 선영 아래 건좌(乾坐) 언덕에 장례하였다. 배 죽산 박씨(竹山朴氏)는 내현(來鉉)의 따님으로 부군과 동갑으로 十七년 후 五월 二十八일에 졸하였는데 묘는 부좌(附左)이다. 三남 一녀를 길렀으니, 정훈(正勳)·재훈(在勳)·명훈(明勳)인데 재훈은 출계하였으며, 딸은 창녕(昌寧) 조 병설(曺秉卨)에게 출가하였다. 손자 태익(泰翼)과 윤익(崙翼)은 장방(長房) 소생이요, 성익(成翼)은 과방(過房) 소생이며, 수익(洙翼)과 선익(宣翼)은 계방(季房) 소생이다. 이하 증손·현손은 번거로와 다 기록하지 못하며, 부군의 유고(遺稿)가 세상에 전하고 있다. 아! 부군의 학문과 행의는 후세에 전할 것이 많으나 불초의 재식과 성의가 부족하여 그 덕의 만분의 일도 다 천양(闡揚)하지 못하겠으니, 어찌 슬픔을 견디겠는가? 올봄에 여러 종형제들이 비석 세울 것을 의논하고 볼초 내가 대략이나마 이상과 같이 적는다. 갑자(一九八四)년 三월 상완(上浣)에 수익(洙翼)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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